알프레드 히치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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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런던 거리 - 낮

부산스러운 도시의 하늘 위로, 불길하도록 평온하게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날이 밝
는다. 천천히 시점이 길거리까지 내려오고, 활기차게 바쁜 낮의 런던의 모습과 소리가 눈과 귀를 가
득 채운다.

한참 뒤, 종이 한 장―위대한 영국계 서스펜스 영화 감독에 관한 백괴사전 문서―이 눅눅한 배수로에
끼여 산들바람에 가만히 펄럭인다.

곧, 바람이 불어 문서를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문서는 택시를 잡으려다 놓친 바쁜 런던 통근자 한 명
의 얼굴에 철썩 달라붙는다. 그는 문서에 대고 욕지거리를 하고, 문서는 도로 날아간다.

        통근자
    택시!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어린 사내애가 그 외투자락을 잡아당긴다. 남자는 성마르게 아이를 뿌리친다 - 하지만 아이는 집요하다.

        통근자
    뭐야, 이 자식아? 회의에 늦게 생겼다고!

        사내에
    저기요 아저씨. 혹시 이 바람에 불어 날아간 문서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통근자
    문 뭐?

        사내에
    문서요. 위대한 영국계 서스펜스 영화 감독에 관한.

        통근자
    무슨 소리를 하고 자빠진 거야? 난 그딴 거 본 적도 없고, 지금 시내로 가는 차 잡기에도
    바쁘단 말야.

        사내애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한참 뒤 마침내 택시가 다가와서 남자 앞에 멈춰선다. 택시기사는 좀 뚱뚱하지만 위엄 있는 남성으로,
반백의 머리칼은 벗겨졌고 턱살은 마치 불독과 같다.

그런데 그때, 옆의 벽돌 건물 구석 근처에서 총의 총열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가 택시 문짝을 열려는
순간, 총성이 울리고 통근자는 내장을 움켜쥐면서 몸을 웅크린다. 서서히 쓰러지는 통근자. 여자들의 새
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모든 것이 검은 색으로 물들어 간다.


내부. 사무 회의실 - 낮

런던의 고층 사무 건물의 회의실에서 회색 양복을 빼입은 일련의 사업가 한 무리가 초조해 하고 있다.
그들 모두 열띤 논쟁의 불협화음에 휘말려 있다.

회의 의장이 큰 소리로 박수를 쳐서 시끄러운 소리를 가라앉힌다. 회장은 건장하고 태없는 미국인으로,
말버릇은 느릿느릿하고 인상은 친절해 보인다.

        회장
   신사 여러분, 이보세요. 이런 식으로 왈가왈부해서 아무것도 되는 게 없습니다. 적당히들 하세요.
   우린 여기 지금 이 문서를 쓰고, 쓰고, 쓰려고 모인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고요. 논점
   을 흐리는 말다툼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찰리
   회장님, 실례지만 한 말씀 올려도.

        회장
   당신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찰리, 난 우선 이 모든 것들을 제어하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군요. 그러
   니까 내 말은…. 이-이-이-이게 뭡니까? 자, 들어 봐요. 우린 지금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이 문서
   를, 백과사전 문서를 쓰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목적이라고요. 다들 이해했습니까, 여러분?

모두들 고개 끄덕이고 우물우물 동의한다.

       회장
   그래, 우리가 이… 히치콕이라는 양반에 대해 아는 게 뭐지요?

영국 토박이 사업가 그레고리가 탁자 윗면에서 문서를 집어올린다.

       그레고리
   음, 회장님. 우선, 알프레드 히치콕은 지금까지 영화사상에서 서스펜스 장르의 가장 위대한 영화 감
   독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회장
   흠,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레고리. 그거 좋군요. 정말 좋아요. 좋은 시작입니다.

       찰리
   회장님. 저 역시 한 가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있어서 확실한 차별화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회장
   계속 말씀해 보세요, 찰리.

       찰리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시다시피, 미스터 히치콕이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완벽한 것은 대본이라
   느꼈다는 점은 잘 문서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시나리오의 지면상 표현을 영화로 옮길 때,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바의 40 퍼센트 정도가 항상 소실되는 것 같다고 한 인용문도 있습니다. 히치콕이
   영화, 적어도 그 장르의 영화의 시각 언어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된다는 것을 생각
   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회장
   틀림없지요, 찰리. 그래서 당신의 아이디어란 무엇입니까?

       찰리
   음, 이 개념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 문서를 기본 뼈대만 있는 대본의 형식으로 써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히치콕 본인이 들어도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장
   흥미롭군요.

       찰리
   특수효과나 장식도 없애고, 영화 스틸컷으로 히치콕의 시각적 미스터리를 모방 하려는 한심한 시도도
   하지 않는 겁니다. 히치콕의 최종 원고를 한 번 읽어 보시면, 총격 장면보다 꽃밭의 묘사가 더 많을 
   때가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우리 역시 그런 방법으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총격 대신
   꽃밭을 묘사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시각적 효과를 제한하는 거죠.

       회장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우리 포럼은 풍자적 백과사전인, 그러니까 그 백과사전적 형식이 주
   가 되는 곳 아닙니까. 시각적 표현을 십분 활용하는 거죠. 당신이 제안한 그런 방식의 접근은 백
   괴대본에서 다루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하비
   음, 제 생각에는 이 경우에는 백괴대본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문서의 핵심 내용입
   니다. 문서에 바탕한 대본이 아니고 말입니다. 대본처럼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헌사를
   바치는 문서인 겁니다. 하지만 백괴대본은 표면적으로 실제 공연물을 직접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
   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이 문서는 문서의 컨텍스트에 대한 단순한 자기인식 장치인 겁니다.

       회장
   좋은 지적입니다. 저기, 하비. 그럼 자기인식은 어떻게 해결하지요?

       하비
   확실히 지나친 자기인식은 히치콕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긴 합니다. 자신이 감독한 모든 영화에
   스스로 카메오 출연한 사실은 그러한 발칙한 자기인식을 드러내는 초월 단계의 감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장
   그래서, 그냥 단순히 히치콕을 비웃는 풍자 문서를 쓰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들인 겁
   니까? 다들 알다시피, 소재는 이미 많지 않습니까. 배우들을 몹시 싫어했던 거라던가? 히치콕이
   배우들을 소라고 부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소 두마리 개그에 써먹으라고 있는 상황
   같은데요.

       찰리
   풍자하는 문서도 좋고, 또 그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풍자 문서는 양이 많은 만큼 그
   질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좀더 재치있고 재미있는 걸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체로 그렇게 재미있지 않다 하더라도, 무조건 왜곡을 통해서 코미디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회장
   그럼 좋아요.

       그레고리
   또다른 사실은, 히치콕이 《싸이코》를 코미디라고 주장했었다는 겁니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데 말이죠. 그 영화 보면서 웃으신 적 있으십니까?

       회장
   음,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랬던 적이 있는 것 같군요. 그래 다 좋다 칩시다. 하지만 아직 한 가
   지 문제가 남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문서를 고전적인 히치콕 영화처럼 만들려면, 그에 맞는 반전
   쩌는 엔딩을 써야 할 겁니다. 그건 어떻게 할 겁니까?

방이 침묵에 휩싸인다. 그레고리가 생각에 잠겨 문서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열린 창문가로 다가간다.

       회장
   그 종이는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그레고리. 창문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시-

세찬 돌풍이 그레고리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 창문 밖으로 날려보내 버린다. 모여 있던 남자들이 일제
히 벌떡 일어선다.

       회장
   그레고리! 문서가!

창문에 기댄 그레고리가 저 아래 길거리의 누군가를 부른다.

       그레고리
   어이! 거기 너! 쬐끄만 남자애! 그래, 너! 거기 그 종이 좀 잡아 다오! 쫓아 가, 임마! 그렇지,
   옳지, 잘한다. 착하기도 하지!

회장은 의자로 돌아가 무너지듯 주저앉고 초조하게 벌벌 떤다.


내부. 회장 사무실 - 낮

회장의 비서 매기가 의장 반대 쪽에 앉아 처리해야 할 서류를 분류한다고 바쁘다. 의장은 자기 책
상에 앉아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회장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매기. 어째서 그레고리처럼 유능하고 성실한 사업가가 이런 일이 일어나
   게 만든 거지? 도대체 무엇에 홀려 그렇게 창문에 가까이 간 걸까? 정말이야, 매기. 이건 분명
   수상한 무언가가 있어.

       매기
   너무 그렇게 조바심 치지 마세요, 회장님. 분명히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회장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어, 매기. 난 그냥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이제 뭘 어떡해야 하지?

       매기
   해결책을 찾으실 거예요. 언제나 그랬잖아요.

       회장
   이 건이 날 너무 괴롭히는군, 매기. 괴롭힌다고. 정말로.


외부. 런던 거리 - 낮

살해당한 통근자의 분필 실루엣 그림만이 남아 그가 죽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찰 테이프가 택시
주위에 둘러쳐지고, 경찰 수사관이 경사와 함께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경관이 어
린 사내애를 경사에게 데리고 온다. 경관은 숨길 수 없는 문제의 문서를 함께 들고 있다.

       경사
   이애가 그 애인가?

       경관
   네, 경사님. 이 애가 바로 목격자들이 피해자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사람이라고 증언한 그 애입니다.

       경사
   그리고 또?

       경관
   이놈을 잡았을 때 이걸 가지고 있더군요.

경관이 경사에게 종이를 건넨다.

       경사
   심문을 해야 할 테니 애를 데리고 가게. 형사님?

       수사관
   어려운 사건이군. 동기도 없고, 흉기도 없어. 일면식도 관계도 없는 어린애 한 명. 그리고 그것.
   나 좀 보세. 그게 뭔가?

       경사
   음, 무슨 문서 같습니다. 유명한 영국계 서스펜스 영화감독에 관한 겁니다.

       수사관
   서스펜스라고? 난 그런 영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경사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서는 영화 대본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어쩌면 그 감독의 영화들 중
   하나인 것 같군요.

       수사관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되었나?

       경사
   그게, 이게 우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형사님. 우리 모든 행동을요. 우리가 지금 하는 말, 하는
   행동 모든 걸.
 
       수사관
   뭐라고? 도대체 그게 뭔가? 그 감독이 그런 걸로 유명하기라도 한가?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으스스한 수수께끼 따위라도 되는 건가?

       경사
   영화에서는 딱히 그렇지는 않았지만, 텔레비전 쇼에서는 확실히 그랬었죠. 그 감독에 대해서 그 
   점을 지적하지 않는 문서는, 분명히 불완전한 문서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수사관
   아마 자네 말이 맞겠지, 경사. 하지만 여전히 좀 충격적이군.

       경사
   확실히 그렇습니다, 형사님.

수사관이 신경증적으로 몸을 떤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54.221.147.93와 정확히 눈을 마주친다. 음
악이 깔리면서 시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길거리 위로 계속 올라가다가 옆에 서 있는 건
물 꼭대기까지 다다른다. 꼭대기 가장자리에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놈은 장면을 골똘히
살펴본다. 마치 자기가 취할 수 있는 행동 방침을 고르려는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 생각을 떨쳐내 버린 놈은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린다.

페이드아웃FADE OUT


끝THE END.